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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나를 바꿔놓은 것들

7월의 어느 오후, 나는 에어컨 바람 아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창밖을 내다봤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름을 견디는 데만 집중하느라, 여름이 정작 무엇을 하는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름은 “참는 계절”이 아니다

한국의 여름은 가혹하다. 기상청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8월 평균 최고기온은 30°C를 넘고, 열대야(밤 최저기온 25°C 이상) 일수는 2010년대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체감 온도 40°C가 넘는 날엔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름을 “버티는 것”으로 여긴다.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고, 가을을 그리워하고, SNS엔 “벌써 가을이면 좋겠다”는 말이 넘쳐난다.

근데 잠깐.

여름에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어떤 맛을 처음 보고 어떤 냄새가 코끝을 스쳤는지 떠올려본다. 나는 기억한다. 여름은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 날 선 강렬함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더위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들

나는 몇 년 전 여름, 친구와 늦은 밤 한강에 나간 적이 있다. 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강변에 앉아, 편의점 맥주를 마시며 아무 계획도 없이 몇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별 것 없었다. 최근에 읽은 책, 요즘 듣는 노래, 그리고 “우리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흔한 물음.

그런데 그 밤이 지금도 또렷하다.

심리학에선 이를 ‘정점-종점 효과(peak-end rule)‘라고 부른다. 인간은 어떤 경험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기억에 새긴다. 한낮의 더위, 냉방된 공간의 서늘함, 저녁 소나기 뒤의 흙냄새. 이 감각들이 여름의 기억을 다른 계절보다 짙게 남긴다.

여름은 기억을 조각한다.


몸이 느려지면, 생각이 깊어진다

직장인에게 여름 점심시간을 물어보면 재밌는 패턴이 나온다. 대부분 밖에 나가는 대신 사내 식당이나 편의점으로 향한다. 움직임이 줄어든다. 그리고 그 시간, 의외로 생각이 많아진다.

나도 그랬다. 밖이 너무 더워 나가지 못하는 점심시간에, 혼자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었다. 처음엔 시간을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쌓이자,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몸이 느려지면 생각이 도망갈 곳이 없다. 더위는 일종의 강제된 느림이다. 바쁜 척하기가 어려워진다.


여름만이 줄 수 있는 것들

솔직히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위를 못 견디고, 습도에 약하고, 모기에 잘 물린다.

그런데도 여름이 끝나면, 이상하게 아쉽다.

그건 여름만이 주는 것들이 있어서다.

이것들은 다른 계절엔 흉내 낼 수 없다. 오직 여름, 그 계절 안에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올여름, 한 번만 더 제대로 느껴보자

나는 올여름에 하나를 다짐했다. 에어컨 리모컨에 손을 뻗기 전에, 잠깐 더위를 그대로 느껴보기로. 불편함을 피하기 전에, 그 불편함이 내게 무슨 말을 거는지 들어보기로.

여름을 빨리 보내려 하지 말고, 딱 하루만 늦은 밤 바깥에 앉아보면 어떨까. 우산 없이 소나기를 한 번쯤 맞아보고, 별 이유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는 일. 사소해 보이지만, 나중에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런 순간들이다.

여름은 결국 지나간다. 하지만 제대로 겪은 여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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